경매 물건의 등기부는 같아도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집이 있습니다. 차이를 만든 것은 매각물건명세서 비고란에 적힌 한 줄, "대항력 포기"입니다. 경매 분석 서비스 옥트(AUCT)가 대법원 법원경매정보를 바탕으로 10월 1~27일 매각기일을 거친 주택 1만3120건을 분석했습니다. 대항력 포기 조건이 붙은 주택은 759건 중 300건이 낙찰돼 낙찰률이 39.5%였습니다. 대항력 있는 임차인이 있는 주택은 6241건 중 1582건만 주인을 찾아 25.3%에 머물렀습니다. 같은 전세 사고 집이라도 서류 문구 하나에 따라 입찰자의 판단이 1.6배나 갈린 셈입니다.
'대항력 포기'가 왜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드나
대항력 있는 임차인이란 말소기준권리보다 먼저 전입신고를 하고 살던 세입자를 말합니다. 이런 임차인은 경매 배당에서 보증금을 다 돌려받지 못하면 남은 금액을 낙찰자에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감정가 3억 원짜리 집을 2억 원에 낙찰받았는데 돌려줘야 할 보증금이 1억 원 넘게 남아 있다면, 싸게 산 것이 아니라 비싸게 산 것이 됩니다. 입찰자들이 이런 물건을 피하고, 그래서 유찰이 반복되는 이유입니다.
대항력 포기 조건은 이 부담을 덜어 줍니다. 임차인이나, 보증금을 대신 돌려주고 그 채권을 넘겨받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같은 기관이 "배당에서 전액을 못 받아도 낙찰자에게 보증금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법원에 확약하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등기부에는 나오지 않고 매각물건명세서의 비고란이나 특별매각조건에만 적힙니다. 서류를 꼼꼼히 읽은 사람만 볼 수 있는 정보입니다.
두 달 만에 뒤집힌 흐름
눈여겨볼 점은 추세입니다. 7월에는 대항력 포기 조건 주택의 낙찰률이 25.0%로, 대항력 있는 임차인 주택(27.5%)보다 오히려 낮았습니다. 9월에는 34.1% 대 24.2%로 뒤집혔고, 10월에는 39.5% 대 25.3%로 격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HUG가 대항력을 포기한 주택만 보면 낙찰률이 7월 27.1%에서 10월 38.3%로 올랐습니다. 평균 응찰자 수도 4.16명으로, 대항력 있는 임차인 주택(2.99명)보다 1.2명 정도 많았습니다.
권익성 옥트 대표는 "보증금 인수 부담이 적다는 점이 입찰자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응찰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배경에는 HUG의 채권 회수 전략이 있습니다. 파이낸셜뉴스 보도에 따르면 HUG는 올해 1~4월 대위변제로 3061억 원을 지급하고 4701억 원을 회수해 회수율 156%를 기록했습니다. 2024년 5월부터 올해 4월까지는 보증사고 주택 6265호를 경매에서 직접 낙찰받아 '든든전세'로 공급했습니다. 직접 낙찰받는 '셀프 낙찰'과 대항력 포기를 함께 쓰면서, 유찰이 반복되던 물건이 빠르게 시장에서 정리되고 있습니다.
입찰 전에 봐야 할 것
이 숫자를 "대항력 포기 물건이면 안전하다"로 읽으면 곤란합니다. 실수요자와 투자자가 확인해야 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포기의 주체와 범위를 확인하세요. HUG가 넘겨받은 채권만 포기한 것인지, 임차인 본인 몫까지 포함하는지는 물건마다 다릅니다. 옥트도 "포기 조건의 범위는 물건마다 달라 매각물건명세서 원문을 꼭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 다른 인수 권리는 그대로 남습니다. 보증금 부담이 사라져도 선순위 가처분·가등기, 유치권 신고, 체납 관리비 같은 문제는 별개입니다. 권리분석은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 명도와 실제 점유를 확인하세요. 서류상 대항력을 포기했더라도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이사 협의는 어떻게 할지는 현장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 낙찰률과 '싸게 샀다'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번 집계는 낙찰률과 응찰자 수만 보여 줄 뿐, 감정가 대비 얼마에 낙찰됐는지(낙찰가율)는 다루지 않습니다. 경쟁이 몰리면 가격도 오르기 마련이고, 빌라라면 낙찰 뒤 되팔기 어렵다는 점도 따져야 합니다.
이 수치는 민간 서비스가 매각물건명세서 기재 내용을 직접 분류해 집계한 것이라 공식 통계와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흐름은 분명합니다. 전세 사고 주택은 계속 경매로 나오고, 이제 승부는 등기부가 아니라 명세서에서 납니다. 남들이 지나치는 한 줄을 읽는 사람에게 기회가 있지만, 그 한 줄만 믿는 사람에게는 위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