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재건축에서 가장 긴 시간이 흐르는 구간은 착공도, 이주도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맨 앞, 정비구역 지정 단계입니다. 그리고 지금 서울에서는 이 첫 관문의 도장을 누가 찍을 것인지를 놓고 서울시와 25개 자치구가 맞서고 있습니다. 오는 9월 구청장협의회 정기회의에 정식 안건으로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그동안 물밑에 있던 논쟁이 공식 테이블로 올라왔습니다.
500세대라는 선
요구의 핵심은 규모별로 권한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장인홍 구로구청장은 지난 7월 7일 500세대 미만 정비구역의 지정 권한을 자치구로 이양해 달라고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제안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지난해 11월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1000가구 미만 현장이라도 자치구에 위임하면 속도가 개선될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기준선이 한 차례 낮아진 셈입니다.
현재 구조는 이렇습니다. 자치구가 주민들과 논의해 대략적인 구획을 정해 서울시에 올리면, 서울시가 도시계획위원회를 열어 결정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서울시의 한정된 인력이 25개 자치구의 안건을 모두 소화해야 하다 보니, 도시계획 승인에만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는 것이 자치구 측의 주장입니다. 1000세대짜리 대단지와 300세대짜리 소규모 현장이 같은 창구에서 같은 절차를 밟으며 순번을 기다리는 구조라는 지적입니다.
서울시가 물러서지 않는 이유
서울시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신속통합기획 도입 이후 정비구역 지정은 "원활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고, 오세훈 시장은 이미 "자치구가 인허가권을 가지면 시장에 상당한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선을 그은 바 있습니다. 우려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난개발, 다른 하나는 자치구 간 경쟁으로 인한 이주 수요 쏠림입니다.
이 두 번째 우려는 실수요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정비구역이 지정되고 사업이 진행되면 그 구역의 주민들은 언젠가 이주해야 합니다. 인접한 여러 구가 각자의 판단으로 비슷한 시기에 구역을 대거 지정하면, 몇 년 뒤 같은 생활권에서 이주 수요가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전세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서면 그 부담은 정비구역 밖 세입자에게 전가됩니다. 서울시가 광역 조정 기능을 놓지 않으려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시각도 갈립니다. 권한이 분산되면 구청장의 정책 의지에 따라 사업 속도 편차가 커지고, 자치구별 기준이 달라 오히려 혼선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반대로 국토교통부는 정비구역 지정 권한을 자치구에도 배분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중앙정부의 방향은 자치구 쪽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투자자와 실수요자가 봐야 할 것
이 논쟁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고, 9월 협의회에서 안건이 올라간다고 해서 곧바로 제도가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확인해 둘 것은 있습니다.
첫째, 본인이 보고 있는 구역의 세대수를 확인하세요. 500세대라는 선이 실제 기준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논의가 소규모 현장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500세대 미만 구역이라면 향후 인허가 경로 자체가 달라질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둘째, 지연의 원인이 어느 단계인지 구분하세요. 서울시는 정비사업 지연의 주원인이 구역 지정 단계가 아니라 사업시행인가·관리처분인가 단계의 조합 내부 갈등과 소송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진단이 맞다면 구역 지정권을 넘겨도 체감 속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업 초기 구역에 진입할 때 인허가 속도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조합 운영의 안정성과 공사비 협상 이력을 함께 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셋째, 권한 이양이 곧 완화는 아닙니다. 자치구가 지정권을 갖는다고 해서 기준이 느슨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히려 구청장이 바뀔 때마다 정책 방향이 흔들릴 위험,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 사업 기간에 얹히는 위험이 함께 따라옵니다.
권한이 어디로 가든, 조합이 스스로 갈등을 관리하지 못하는 현장은 여전히 멈춰 섭니다. 도장을 누가 찍느냐보다, 그 도장 이후를 견딜 조합인지가 결국 더 오래 남는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