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재건축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관리처분 인가가 끝나고 삽을 뜨기 직전, 수천 세대가 동시에 집을 비우는 '이주' 구간입니다. 이 구간은 조합의 의지만으로 넘을 수 없습니다. 조합원은 나갈 전셋집을 구해야 하고,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줘야 합니다. 그 돈이 바로 이주비 대출입니다. 지금 이 자금줄이 막혔습니다. 올해 이주를 앞둔 서울 정비사업 구역 43곳을 조사한 결과, 39곳(91%)에서 이주비 조달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규제는 집을 사라는 대출과 나가라는 대출을 구분하지 않았다
현재 서울 전역은 투기과열지구입니다. 여기에 적용되는 주택담보대출 규제는 1주택자 LTV 40%, 다주택자 LTV 0%, 한도 최대 6억원입니다. 문제는 이 잣대가 이주비 대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이주비는 성격이 다릅니다. 집을 새로 사기 위한 돈이 아니라, 이미 가진 집에서 나가기 위한 돈입니다. 조합원 입장에서는 강제로 이주해야 하는 처지인데, 대출은 투기 수요와 동일하게 취급됩니다. 다주택자라면 LTV가 0%이니 아예 한 푼도 나오지 않습니다.
현장 숫자는 더 매섭습니다. 서대문구 북아현2구역은 조합원의 60~70%가 기본 이주비 대출을 받지 못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노량진1구역은 조합원 961명 중 70%가 1+1 분양 신청자이거나 다주택자여서 대출 제한 대상입니다. 노량진3구역은 518명 중 100여 명, 강동구의 한 재건축 조합은 480명 중 100명이 같은 처지입니다.
돈이 안 나오면 더 비싼 돈을 씁니다. 시공사 신용보강을 낀 추가 이주비는 기본 대출(연 3~4%)보다 1~2%포인트 높고, 2금융권은 연 6.5%, 일부 현장에서는 연 8.5~10%까지 제시됐습니다. 이 이자는 결국 조합원 부담으로 돌아옵니다.
이주가 늦으면 공급이 늦는다
이주비는 조합원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주가 끝나야 철거가 시작되고, 철거가 끝나야 착공과 일반분양이 이어집니다. 이주 단계에서 몇 달이 밀리면 입주 시점은 그만큼 통째로 밀립니다.
7월 14일 국토교통부가 서울 정동에서 연 주택공급 토론회에서 이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됐습니다. 신길2지구 주민대표는 "기존 거주자가 이주하려면 전세금을 마련하고 세입자 보증금을 반환해야 해 이주비 대출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고, 이주비는 투기가 아닌 생계형 대출이라는 지적이 이어졌습니다. 주택산업연구원 측은 "정비사업 자금조달은 일반 주담대와 성격이 다르고 이주비는 사업비적 성격을 띠므로 차등을 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나온 한 통계가 현 상황을 압축합니다.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에 따르면 서울에서 정비사업을 추진 중인 단지는 2,249곳인데, 이 중 실제 시공에 들어간 곳은 7%에 불과합니다.
정부의 저울, 7월 23일
정부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금융당국은 이주비처럼 사업 목적성이 뚜렷한 대출을 일반 가계 주택담보대출과 별도 유형으로 관리하고, LTV 한도를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입니다. 거론되는 안은 세 갈래입니다. 1주택자 이주비에 한해 LTV를 50% 안팎까지 높이는 방안, 6억원 한도를 상향하거나 탄력 적용하는 방안, 공공주도 정비사업이나 공공임대·공공분양을 일정 비율 이상 포함한 사업에만 완화를 적용하는 방안입니다.
전체 기조는 '투트랙'입니다. 전세대출 같은 수요 측 대출은 더 조이되, 공급과 직결된 정비사업 이주비는 일부 풀어주는 구도입니다. 한 추산에 따르면 이주비 규제 완화만으로도 3만여 가구의 공급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습니다.
일정은 촘촘합니다. 국토부는 14일 공급, 15일 금융, 16일 세제 토론회를 차례로 열었고, 7월 23일 대통령 주재 부동산 국민 대토론회에서 논의를 종합할 예정입니다. 이달 말 발표될 대책에 이주비 완화가 담길지가 관전 포인트입니다.
무엇을 봐야 하는가
정비구역 매물을 보고 계신 분이라면 세 가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해당 구역의 이주 시점입니다. 관리처분 인가 직후이거나 이주 개시가 임박한 구역일수록 이번 대책의 영향을 직접 받습니다. 반대로 조합설립 단계라면 아직 먼 이야기입니다.
둘째, 본인의 주택 수와 1+1 분양 신청 여부입니다. 다주택자와 1+1 신청자는 현행 규제에서 대출 대상이 아닙니다. 완화안이 나오더라도 1주택자 중심일 가능성이 있어, 다주택자 조합원의 셈법은 별개로 봐야 합니다.
셋째, 추가 이주비의 금리 조건입니다. 조합이 시공사 신용보강으로 조달하는 추가 이주비는 금리 편차가 큽니다. 연 4%대와 연 9%대는 이주 기간 2년을 곱하면 전혀 다른 부담이 됩니다. 조합 총회 자료의 이주비 조달 계획과 금리 조건을 반드시 확인하셔야 합니다.
이주비 규제는 집값을 잡기 위해 설계된 장치가 공급을 늦추는 쪽으로 작동한 사례입니다. 23일 이후 나올 답이, 멈춰 선 39곳의 시계를 다시 돌릴지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